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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대가치의 위험성 (김홍관-대구광역시 의사회 게재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4-25
이메일 hanjungwoo.82@gmail.com
 

절대가치의 위험성 (대구광역시 의사회 게재글)

                            

  필자는 최근 조너선 D. 스펜스의 ‘현대 중국을 찾아서’라는 책을 읽었다. 동북공정으로 인하여 중국과 한국이 고대사의 역사해석에 대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 시기에 미국인이 쓴 중국역사를 읽음으로써 민족주의에 전염되지 않은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중국역사를 관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본 책에는 명나라의 멸망 과정부터 천안문 사태까지 최근 약 400년간의 중국사가 기술되어있다.

  

  필자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중화사상’ 즉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당시의 절대가치였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팔기군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무력과 유교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족(漢族)과 주변 민족들을 성공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보다 영토를 두 배 이상 늘였고,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였다. 특히 강희제로부터 그 손자 건륭제로 이어지는 강건성세(康建盛世) 150 여 년 간은 중국역사에서 가장 융성한 시대였다. 


  그런데 만주족도 한족의 전철을 밟게 된다. 즉 자신들이 한족을 대신하여 세계의 중심에 섰다는 자만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실 만주족은 한족들에게 변발과 만주복식만 강요했을 뿐 정치, 제도, 사상, 풍속 등은 철저히 한족들의 것을 존중해 주었고 또 받아들였다. 그리고 유학을 정치와 교화의 척도로 인정했다. 이리하여 인도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을 식민지 삼으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든 영국을 오랑캐(夷)라고 표현하고 영국 사신에게 청태종이 인조에게 요구했던 삼배구고두의 예를 강요했다. 청나라는 유럽 여러 나라들을 은혜를 베풀어야할 오랑캐라고만 여겼지 그들로부터 문물을 배워야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 격의 중화사상의 문제점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폭발했다. 중국은 명분상 훨씬 우월한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여지없이 패배하여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했다. 이후 중국은 서양열강의 놀이터가 되었고 서양과의 전쟁에서 패배만 하였고 그 때마다 항구도시를 서양 여러 국가에 조차지로 내주는 반식민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개혁을 통하여 중국을 발전시키자는 강유위(康有爲)의 1898년 변법자강운동도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유학을 근간으로 서양의 학문 제도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중화사상을 근본에 두고 있기에 그 한계는 분명했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동시대 조선의 태도를 살펴보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의 명나라를 도와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친명반청 정책으로 인하여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맞게 된다. 이 반청모화 사상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아편전쟁이 일어나던 1840년부터 조선이 망하던 1910년까지 70 년 간 조선은 별다른 대비를 못했다. 당시 중화를 자처하던 청나라가 서양 열강에 여지없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은 끊임없이 조선에 들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문화만 존중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존화양이(尊華攘夷)를 내세우며 쇄국만을 주장했다.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개화의 토양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어떠했는가? 애초부터 일본에는 중화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편견이 없었다. 일본은 청나라가 서양열강에 지속적으로 패배하는 것을 보고, 조선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점을 간파한 후에 스스로 중국과 조선과는 거리를 두고 서양문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세아에서 벗어나 서양 문물을 배우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국시가 되었다. 이런 발 빠른 변신으로 인하여 일본은 유신 20년 만에 정치, 경제에서 완전히 근대화를 이룩하였고 아세아를 재패할 수가 있었다.


  중국은 뼈아픈 근대사를 통하여 중화사상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민족적으로는 한족이 세계의 중심이고 주변민족은 오랑캐라는 생각을 포기하고 ‘중국은 하나다’라고 하면서 한족과 중국내 여러 소수민족의 화합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모택동의 교조적 공산주의의 광기로 야기되었던 문화대혁명의 결과 수 천만 명이 맞아 죽거나 굶어 죽은 전철을 반성하고,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를 도입한 결과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와 유교적 전통을 섞어서 형성한 제도를 개혁하여 민중의 의사가 정책에 반영되는 민주정치를 도입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절대가치의 폐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패배를 통한 발전은 인류역사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유럽의 경우 신본주의가 지배하던 중세 천 년 간은 오직 신에 의한 구원만을 생각하던 암흑기였다. 이 암흑기를 밝혀준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다. 200여 년 간의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유럽이 지속적으로 패배하기만 하자 기독교인들은 ‘왜 신의 군대가 패하기만 하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교황과 신의 권위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인간의 이성을 신 즉 믿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은 급속히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주의에서 벗어나면 세상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폭 넓은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최근 이슬람국가에서 민주화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십자군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자만에 빠져서 ‘알라신’ 절대주의에 빠졌던 이슬람국가들은 신정국가가 되었다. 즉 통치자는 신을 대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자에 대한 반항은 신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절대왕정이나 장기독재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이슬람 국가들이 지난 100년 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서서히 신본주의가 쇠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도 조선시대에 중화주의라는 절대가치로 인하여 500 여년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 우리는 절대가치가 인류역사 발전에 미친 해악을 똑똑히 인식하고 근본주의를 단호히 배격하여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는 열린사회를 만들어야 겠다. 


김홍관(성동병원 정신과 전문의·선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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